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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역사 26) _ 과도기 영화, 영화산업

by 멍뭉이헤븐 2023.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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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도기 영화

1907년에서 1913년 사이 미국과 유럽의 영화 산업 조직들은 동시대 산업 자본 성격의 기업들에 필적하기 시작했다. 비록, 특히 미국을 포함해, 이들 지역에서 몇몇 제작사들이 산업 전체에 대한 과점적 지배를 확립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으나 제작, 배급, 상영 등이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영역이 됨에 따라 산업적 분화는 심화되고 있었다. 신제품의 정기적 공급을 원하는 상영업자의 끊임없는 요구에 맞추어 영화의 길이가 좀 더 길어짐에 따라 영화적 관습의 체계화와 노동의 분화는 물론 제작 방식의 표준화가 요구되었다. 영구적인 상영 장소의 확보는 수익의 최대화는 물론, 배급과 상영 과정에서의 합리화에 도움이 되었으며, 영화 산업을 보다 안정적인 기반 위에 서게 했다. 대다수 국가에서 초창기 영화들은 매우 적은 관객을 끌어들였으며 수익은 빠른 자본 회전에 의존했기 때문에 짧은 영화와 그 상영물의 잦은 교체가 필수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작자들은 끊이지 않는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길이가 짧은 표준화된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이런 수요는, 새로이 등장하고 있는 대중 관객의 꾸준한 선호도를 보장할 수 있는, 연극적 모델에 따라 형성된 스타 시스템의 구축으로 강화되었다.

이 시기의 영화는 종종 ‘내러티브 통합의 영화’라 말해지며 더 이상 관람자의 영화는 영화 텍스트 외적인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통일성을 갖는 내러티브를 창출하기 위한 영화적 관습을 이용했다. 비록 1시간 이상 상영되는 소위 ‘장편 영화’ 또한 이 시기에 첫선을 보였지만 당시 평균적인 영화는 1,000피트의 릴이라는 표준적인 길이를 갖게 되었으며, 약 15분 동안 상영되었다. 일반적으로 ‘내러티브 통합의 영화’는 영화가 점차 문화적 주류가 되며 진정한 첫 번째 대중 매체로서 자리매김하는 시기와 일치했다. 영화사들은 공적 기관과 민간 조직의 압력에 대해 내부 검열 전략과 영화와 영화 산업이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존중받도록 할 수 있는 별도의 전략으로 대응했다.

2) 영화 산업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유럽 영화가 국제 시장을 주도했으며 프랑스, 이탈리아, 덴마크가 주요 수출국이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수입하는 60~70퍼센트는 프랑스 영화였다. 프랑스 최고의 영화사 파테는 상대적으로 적은 자국의 수요 때문에 적극적인 해외 팽창을 추구했다. 파테는 세계의 주요 도시에 현지 사무소를 세우고 영화와 장비를 판매하는 순회 판매원을 파견했고, 그 결과 겨우 하나의 자국 영화사가 지탱할 수 있었던 각국의 시장을 지배하게 되었다.

미국 영화사들은 자국 시장 내에서 유럽 영화 상품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했는데, 과도기 동안에 상대적으로 성공적인 영화 제작사들이 번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많은 수가 여전히 유럽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파테 사는 1904년 미국에 사무소를 개설했고, 1907년까지 영국과 이탈리아 등 외국 영화사들도 미국 시장에 정상적으로 진입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영화사들은 클라인 광학 Kleine Optical Company를 통해 영화를 배급했다. 이 회사는 그 당시 외국 영화를 미국에 수입했으며, 영화가 장편화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07년, 특히 파테 사를 포함한 프랑스 영화사들은 외국 영화사와 함께 미국 영화 시장을 장악했다. 그해 미국에서 상영된 1,200편 가운데 400편만 미국 영화였다. 미국 영화 산업은 이런 결과에 주목했으며, 그 해 ‘영화 세계 Motion Picture World’와 함께 확립된 영화 업계 전문 잡지들은 종종 수입 영화들의 낮은 품질에 불만을 토로했고, 동시대의 소재를 다루는 외국 영화들에 대해 스토리를 이해하기 어려우며 더욱 나쁜 것은 비미국적인 가치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라고 비난했다.

역설적인 것이지만 영화 배급을 합리화하려는 좀 더 이른 시기의 시도가 최대의 수익을 올리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미국 영화 제작사들은 이 시기가 지난 후 국제적 진출 시도를 시작했고, 유럽 기업이 전쟁의 여파로 움츠러들고 있는 1914년에는 1위의 자리에 올라서게 되었다. 1907년 바이타그래프 사는 미국 주요 회사들 가운데 첫 번째로 해외에 자사 영화 배급사를 설립했고, 다른 미국 제작사들도 1909년에 미국 영화 유럽 배급의 중심 조직으로 1916년까지 남아 있게 되는 대리 회사들을 런던에 설립했다. 그 결과 영국 산업은 자국의 주도권을 미국에 양보하면서 제작보다는 배급과 상영에 집중하는 경향을 띄었다. 미국은 영국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의 최소한 반 이상을 차지했고, 나머지 상당 부분은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차지했다. 독일 또한 안정된 기반의 자국 산업이 없었으며, 미국 영화가 두 번째로 높은 수익을 올리는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 전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 내에서는 이들 국가 영화사들과 경쟁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미국 영화들은 유럽 이외의 지역에도 배급되었으나 대부분 미국의 스튜디오들에 큰 이익이 되지는 않았다. 이들 스튜디오는 영국 배급사들에게 영국 본토와 몇몇 유럽 국가들은 물론 영국 식민지 지역에 대한 자국 영화의 배급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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