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PC의 등장과 영향
MMPC의 회원사들은 자신들의 영화에 대해 피트당 표준 가격을 정하는 데 동의했으며, 각 스튜디오는 미리 작성된 스케줄에 따라 1~3 릴의 영화를 출시하기로 하는 등 영화의 출시를 조정했다. MMPC는 배급 시설과 상영 장소에 대한 공공연한 소유를 통해서 통제권을 행사하려 하지 않는 대신, 사용 허가권을 구입해야만 이용 가능한 MMPC의 필름과 장비들에 대한 영화 거래소와 상영업자의 수요를 활용했다. 사용 허가를 받은 영화 거래소들은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반환을 약속하면서 영화를 공공연히 팔기보다는 임대할 수밖에 없었다. MMPC로부터 특정 수준의 안전과 위생 상태 확보 여부를 면밀히 조사받았으며, 매주 특허권이 있는 영사기에 이용 수수료를 지불하기로 되어 있는 허가받은 상영업자들만이 영화 거래소에서 트러스트의 영화들을 임차할 수 있었다. 트러스트의 약정은 시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고, 외국 영화의 경쟁력을 약화시켜 1909년 말 수입 영화의 비중은 전체 상영 영화의 채 절반도 되지 않았으며 그 수치는 계속해서 떨어졌다. 트러스트의 배타적인 정책의 밑바탕에 깔린 외국 영화에 대한 편견이 유럽 스튜디오들이 미국 시장에 좀 더 먹힐 수 있는 ‘고전적인’ 소재, 예를 들면 소설 각색과 역사물 등에 대한 제작 의지를 갖는 데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1908년 당시 영화 거래소에 외국 영화를 공급하는 최고의 영화사라는 지위 때문에 MMPC의 회원사가 되었던 파테 사는 예술 영화 film d`art의 형태로 유럽 고급문화를 수입하는 방식을 통해 이런 방향의 첫 시도를 했다.
1910년 MMPC는 제너럴 필름 사General Film Company라는 별도의 배급 회사를 조직함으로써 이후 할리우드 스튜디오 관행의 전조가 되는 사업을 시작했다. 제너럴 필름 사는 정기 구매 standing order(일괄 판매 방식 block booking의 초기 형태)와 특정 지역 내에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상영업자를 미리 정함으로써 불필요한 경쟁을 줄이는 구역 제한을 제도화했다. 새로 출시되는 영화에 대한 높은 대여료와 이미 유통된 영화에 대한 낮은 대여료의 차이는 이후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특징이 되는 것으로, 개봉관과 오래되고 저렴한 영화를 상영하는 장소를 구별하는 계기가 되었다.
MMPC는 셔먼 반독점법으로 불법이라 선언되는 1915년까지는 합법적인 기구로 남아 있었으나, 법률상으로 쇠퇴하기 수년 전인 1912년부터 트러스트는 사실상 산업에 대한 의미있는 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 시점에 소속사의 회원들은 사실 미국 영화 산업의 낡은 보호책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었고, 많은 회사들은 법원의 불리한 판정 이후 곧 사라졌다. 그들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막 성장하던 할리우드의 거물들로 그 많은 수는 과점적 통제를 가하려는 트러스트의 시도에 저항하면서 처음부터 산업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 왔던 사람들이었다.
제휴 관계에 있지 않은 배급업자와 상영업자를 영화업계에서 몰아내려는 MMPC의 근시안적 계획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파괴하는 씨앗을 뿌리는 격이 되었는데, 그 정책으로 인해 많은 허가받지 않은 영화 거래소나 니켈로디언에 영화를 공급하는 소위 ‘독립’ 제작사들의 강건한 조직이 생겨났다. 배급업자로 업계에 입문한 칼 레믈리는 MMPC로부터 영화를 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고객에게 공급할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 1909년 후반 IMP로 알려진 인디펜던트 영화사 Independent Motion Picture Company를 세웠다. 그해 말 IMP는 이 탈라 사와 암브로시오 사의 이탈리아 영화 2편과 자체적으로 제작한 영화를 주당 2편씩 배급하여 트러스트 계열사가 가운데 가장 강력한 회사와 경쟁하게 되었다. 레믈리는 MMPC 반대의 선봉에 섰을 뿐만 아니라 IMP는 세를 확장하여 종국에는 무성 영화 시대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하나인 유니버설 Universal 영화사가 되었다. 이 시에 다른 독립 영화 제작사들도 업계에 뛰어들었는데, 이들 가운데 중요한 회사에는 센토 영화 제작사 Centaur Film Manufacturing Company, 네스터 Nestor 사, 토머스인스를 처음 고용한 뉴욕 영화사 New York Motion Picture Company 등이 있었다. 1910년 에드윈 탄하우저는 탄하우저 Thanhouser 사를 설립했는데 자기 소유 극장의 전속 극단을 이용하여 소설과 연극 각색물을 전문으로 제작하였다. MMPC가 제너널 필름 사를 설립한 1910년에 독립 제작사들도 트러스트에 저항하는 자신들의 조합을 결성했다. 그들의 배급망인 영화 배급 판매사 Motion Pictuer Distributing and Sales Company는 트러스트의 관행을 모방한 것으로 출시 일자와 피트당 가격을 정하고, 영화 거래소에서 스튜디오로의, 그리고 영화 상영업자에서 영화 거래소로의 정기 구매를 제도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