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토리 서사의 필요
다른 매체의 시각적 관습을 모방하는 한편 영화 제작자들은 관객에게 이미 널리 알려진 스토리들로부터 많은 영화를 끌어냈다. 에디슨은 ‘크리스마스이브 Night before Christmas’(포터, 1905)에 대해, 영화가 ‘클레멘트 클라크 무어가 저술한 유서 깊은 크리스마스 전설을 아주 가가깝게 따랐다’고 광고했다. 바이오그래프와 에디슨 영화사 모두 히트곡 ‘아빠만 빼고 다들 일해요 Everybody Works but Father’를 영화화했다. 바이타그래프 영화사는 몇몇 뉴욕 신문들의 일요판 부록에 실리던 인기 있는 만화의 주인공인 부랑자를 소재로 ‘해피훌리건 Happy Hooligan’ 시리즈를 제작했다. 많은 초창기 영화들의 경우, 매우 복잡한 스토리를 대략적으로 요약한 이야기를 전달했는데 그 제작사들은 추측건대 꼭 필요한 서사적인 통일성을 가져오기 위한 영화적 관습들보다는 해당 소재에 대해 관객이 이미 알고 있는 정보에 크게 의존했다. ‘나폴레옹 서사시(파테, 1903~1904)는 잘 알려진 역사적 사건(대관식, 모스트바 전소)과 일화 (나폴레옹이 잠자는 보초 대신 경계 근무를 선 일)에서 가져온 일련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통해 나폴레옹의 삶을 보여 주었으며, 전체 15개 숏들 사이의 인과적인 선형적 연결, 혹은 서사적 발전에 대한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비슷한 방식으로 ’ 술집에서의 열흘 밤‘과 ’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같은 복수 릴 영화들은 잘 알려지고 자주 공연되는 이들 멜로드라마의 주요 부분만을 전달했다. 여기에서의 숏들의 연결은 편집 전략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사건들에 개입된 관객의 지식에 의존했다. 그러나 후자의 영화는 삽입 자막이 등장하는 초창기 영화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숏의 사건을 미리 요약하는 이러한 자막들은 1903년과 1904년경 복수 릴 영화와 같은 시기에 등장했으며, 외부적으로 주어지는 서사적 연속성보다는 내부적으로 주어지는 연속성의 필요성에 대한 영화 제작사들의 인식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크리스마스 이브Night before Christmas’(포터, 1905)
2) 상영 장소의 변화
영화는 그 출현 시기에는 대중적 오락물로서가 아니라 과학적이고 교육적인 신발명품으로 존재했다. 특정 영화가 아니라 영화적 장치 자체와 움직임을 재현하는 것에 불과한 그 기능이 관객에게 매력의 대상이 되었다. 많은 국가에서 활동사진 기계는 만국 박람회와 과학 전시회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에디슨 사는 비록 시간에 맞춰 기계들을 조립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에서 키네마토스코프를 선보이려고 계획했고, 영화 관련 기계들은 1900년의 파리 만국 박람회의 몇몇 부문에 출품되어 많은 관심을 끌었다.
비록 영화 상영을 위한 전용 장소가 자리 잡은 것은 미국의 경우는 1905년, 그리고 다른 나라들은 그보다 약간 뒤에야 가능했지만 영화의 상영은 매우 빠른 속도로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를 위한 기종 장소들의 프로그램으로 편입되어 갔다. 미국에서 영화는 대중적인 보드빌 극장에서 상영되었고 세기의 문턱에서 오후나 밤의 유흥거리를 위해 25센트를 지불할 수 있는 상당히 부유한 계층을 만족시켰다. 교육적인 주제에 관해 강연을 제공했던 순회 흥행사들은 영사기를 가지고 전국을 돌며 지방 교회나 오페라 하우스에서 영화를 상영했고 이때 대도시 관객들에게 브로드웨이 연극 입장료와 똑같은 2달러를 받았다. 보다 저렴하고 보다 대중적인 상영 장소에는 박람회와 사육제에 들어서는 천막 쇼와 유명한 니켈로디언 nikelodeon의 전례가 되는 일시 임차 거리 점포 등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 초창기 영화 관객들은 이질적이었고 어느 한 계층이 주도적이지 않았다.
영국에서 초창기의 영화 상영은 대다수 유럽 국가에서 그런 것처럼 미국와 비슷한 유형을 따랐다. 주요 상영 장소는 박람회나 서커스 따위가 열리는 곳이나 뮤직홀, 쓰이지 않는 점포 등이었다. 순회 흥행사들이 영화를 박람회나 서커스 등이 열리는 장소의 주요 볼거리로 선전하면서 새로운 매체의 대중성을 확립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박람회와 뮤직홀이 주로 노동 계층을 끌어들였다는 것을 고려할 때 영국에서의 초창기 관객들은 유럽 대륙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보다는 좀 더 동질적이었다.
상영되는 장소가 어디든 혹은 그 관객이 어떤 계층이든 이 기간의 상영업자들은 종종 영화 제작자들 스스로가 그러했던 것만큼이나 영화의 내용을 상당히 통제했다. 1903~4년경 복수 릴 영화와 삽입 자막이 등장하기 전까지 영화 제작자들은 영화를 개별 단위로 제공했지만, 상영업자들은 그것들을 짜 맞추어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단일 숏의 영화들이었기 때문에 환등기 슬라이드 이미지와 자막 카드와 같은 다른 매체의 포함 여부와 영화들의 상영 순서 등에 대한 선택과 결정이 가능했다. 몇몇 기계 장치들은 상영업자들이 슬라이드와 필름 사이의 매끄러운 전환을 가능하게 하도록 영화 영사와 입체 환등기 stereopticon, 혹은 한 등 슬라이드 영사기를 결합함으로써 이러한 과정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뉴욕 시 이든 박물관 Eden Musee은 한 등 슬라이드와 서로 다른 영화사에서 제작한 20여 편의 영화를 결합하여 스페인-미국 전쟁에 관한 특별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주요 상영업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던 세실 헵워스는 한 등 슬라이드 중간에 영화를 섞어 상영하는 것과 자료들을 함께 묶어 낼 수 있는 해설을 동반하여 ‘영화들을 작은 세트, 혹은 에피소드로 엮을 것’을 제안했다. 영사기의 성능 향상으로 50초 이상 지속되는 영화 상영이 가능하게 되자 상영업자들은 12편, 혹은 그 이상의 필름을 이어 붙여 특별한 주제에 관한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상영업자들은 프로그램의 시각적 측면들을 조정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사운드를 추가했다. 사실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무성 영화는 무성이 전혀 아니었다. 그것이 대규모 오케스트라이든 단순한 피아노 솔로이든 적어도 음악만은 보드빌 극장에 상영되는 모든 영화에 수반되었다. 순회 흥행사들은 필름과 환등 슬라이드를 영사하면서 강의를 제공했는데, 그 구술 설명은 제작자가 본래 의도한 바를 포함하여 다양한 의미들을 이미지들에 부가할 수 있었다. 많은 상영업자들은 심지어 효과음과 배우들이 스크린 뒤쪽에 서서 말하는 육성 대사까지 추가했다.
그 출현 이래 10년이 지나갈 즈음에 영화는 흥미로운 신발 명품으로서, 즉 점차 그 템포가 빨라지는 20세기의 삶의 일부를 차지하는 많은 오락거리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그럼에도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매체는 여전히 그 형식적인 관습과 스토리텔링의 장치에 있어 기존의 다른 매체에 다소 시대에 뒤진 개인들 중심의 제작 방식에, 그리고 보드빌과 박람회와 같은 기존의 상영 장소에 크게 의존했다. 그러나 그다음의 10년 동안 영화는 커다란 진전을 이루어 그 나름의 고유한 형식적 관습, 산업 구조와 상영 장소를 완비한 20세기의 진정한 대중 매체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