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컬러
;1896년 같은 이른 시기에 이미 매우 정교한 붓으로 프레임별로 손으로 직접 색을 칠한 필름의 복사본을 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술로 성취한 결과는 멜리에스의 ‘요정의 왕국(1903)’의 경우처럼 종종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이 작품의 이미지들은 중세 미니어처의 영광을 재현했다. ;그러나 색을 프레임의 정확한 위치에 배치되도록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것을 성취하기 위해 1906년 파테는 파테컬러라는, 필름 베이스에 기계적으로 색을 물들이는 방법에 대한 특허를 확보했다. 프랑스 어로 ‘오 포슈아르’, ‘영어로는 ’ 스텐실‘이라 알려진 이 기법은 여섯 가지 색조 표현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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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색을 입히는 방법
;이보다 훨씬 더 저렴한 방식은 그림 같은 효과 혹은 극적인 효과를 강화하기 위해서 각 프레임 혹은 시퀀스별로 필름에 단일 색을 입히는 것이었다. 이것을 위한 세 가지 기본적인 방법이 있었다. 먼저 착색으로 구체적으로는 베이스에 유색 투명질을 바르거나 필름을 유색 염색 용제에 담그거나 혹은 미리 색을 입힌 필름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다름은 조식으로 젤라틴 층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유제의 은 성분을 유색 금속염으로 대체하는 방법이었다. 마지막으로 매염은 조색의 변형으로 사진 유제를 유기 착색제를 정착시킬 매염 그리고 기계적 채색 등은 서로 결합되어 사용될 수 있으므로 각 기법의 창의적 가능성은 배가되었다. 착색 기법의 환상적인 변형이 제시되었는데 ; 이것은 석판 인쇄술에서 가져온 정교한 방식이었다. ;
;적색, 녹색, 청색 이미지들을 겹치게 함으로써 컬러 필름을 현실화시키려는 최초의 시도는 1899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조지 앨버트 스미스가 자신의 키네마컬러를 이용해 상업적으로 실용적인 결과를 얻게 된 것은 1906년에 들어서였다. 스미스는 적색과 녹청색 등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 반투명 원판을 카메라 앞에 배치했다. 그 필름은 초당 32 프레임으로 똑같은 필터들을 통해 영사되었고 그 결과 2개의 기초적인 색상은 단지 약간의 색채적인 차이가 있었을 뿐 전체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효과를 산출하며 하나의 이미지 속에 [융합]되었다. 스미스의 발명은 널리 모방되었고 1913년 고몽 사, 1915년 독일 아그파 사 등에 의해서 3색 체계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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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최초의 컬러 감응 유제
;흑백 감응 유제가 아닌 최초의 실질적인 컬러 감응 유제는 1915년경에 이스트먼 코닥 사가 개발하여 곧바로 코다크롬이라는 상표로 시장에 판매했다. 이것은 여전히 2색 체계였으나 이후 일련의 주목할 만한 발전의 첫 단계였다. 같은 시기에 허버트 칼머스, 버튼 웨스트콧, 대니얼 프로스트 콤스톡이 테크니컬러 활동사진 회사를 설립하여 2색 가색 혼합에 기초를 둔 체계를 실험했다. 그래서 얻은 결과에 실망한 세 사람은 1919년에 방식을 바꿔 1868년 뒤클로 뒤 오롱이 최초로 그 이론을 정리한 감색 혼합 원리의 이용 가능성을 탐구했다. 이것은 각각 특정 색상의 빛이 여과되어 제거된 이미지들을 결합하는 방식이었다. 그 이미지들이 결합되었을 때 색 조화가 복원되었다. 감색 원리를 이용하여 테크니컬러 팀은 3년의 준비 끝에 컬러 영화를 내놓았다. 그 결과물인 ‘바다의 대가(체스터 프랭클린, 메트로 픽처스, 1922)는 별도의 색들이 맞대어 겹치도록 2개의 네거티브에서 인화한 2종의 포지티브 이미지로 구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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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후반과 1920년 초반에 컬러 분야에서 다른 많은 발명이 있었으나 1910년대 말엽에 이미 칼머스와 동료들이 그 분야에서 앞서 나가고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 이들의 시스템은 1930년대와 1940년대 상업 영화 제작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다른 한편, 무성 영화 시대의 대다수 필름들은 위에서 언급된 프린트 채색 방법을 이용하여 계속해서 생산되었다. 문자 그대로의 흑백 필름은 소수에 속했는데 주로 작은 회사의 단편 코미디에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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